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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창업 이야기

(시니어 창업 이야기 16편) “시장 끝, 그 풀빵 굽는 어르신 아세요?”

시니어 창업 이야기 16편
“시장 끝, 그 풀빵 굽는 어르신 아세요?”

글: 강창모 기자

 

서울 중랑구 어느 재래시장 초입, 입김이 허공에 흩어지는 겨울 아침. 상인들이 천막을 걷어 올리고 하루 장사를 준비하는 사이, 달콤하고 고소한 풀빵 냄새가 골목 끝까지 번집니다. 그 향기를 따라가면, 작은 의자에 앉아 묵묵히 반죽을 나누고 있는 여든 살의 박종식 어르신이 있습니다.

무려 60년 가까이, 어르신은 한 자리를 지키며 겨울을 풀빵 틀 앞에서 보내왔습니다.

빵틀 옆에는 오래된 가스통과 삐걱이는 의자, 그리고 매일 깨끗하게 다려 입는 앞치마가 자리합니다. 그 모습은 시장 사람들에게 익숙한 풍경이자, 계절이 바뀌어도 변치 않는 ‘겨울의 얼굴’입니다.

“이건요, 그냥 풀빵이 아니라 제 손맛이고, 제 시간이죠. 팥소 하나도 제가 밤새 삶아 으깹니다.”


하루 천 개도 거뜬했던 시절

스물셋이던 해, 처음 리어카를 끌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오뎅, 호떡, 붕어빵까지 여러 간식을 만들었지만, 손과 마음이 가장 익은 건 풀빵이었습니다. 반죽을 뜨고 팥소를 넣는 동작은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해졌습니다.

“그땐 손이 날아다녔어요. 눈 감고도 반죽하고 팥소 넣었죠.”

당시엔 하루에 천 개도 거뜬했지만, 이제는 하루 200개면 충분합니다. 몸은 예전 같지 않지만, 풀빵을 기다리는 발걸음은 여전히 이어집니다.

“옛날엔 아이들이 학교 끝나면 줄 섰어요. 이제는 그 아이들이 자기 애 손을 잡고 다시 와요. 그럴 땐… 말로 못 하게 기뻐요.”


혼자지만, 외롭지 않은 자리

아내는 열 해 전 세상을 떠났고, 아이들은 각자의 삶에 바쁩니다. 그럼에도 어르신은 매일 같은 시간에 시장에 나옵니다. 이 자리가 곧 삶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가 제일 편해요. 하루가 여기서 시작되고, 사람들 얼굴 보면 살아있단 기분이 들어요.”

단골 손님이 커피 한 잔을 건넬 때면, 손끝에 온기가 스며듭니다. “추우시죠, 이거 드세요.” 그 한마디가 추운 아침 공기를 녹이고, 어르신의 미소를 불러옵니다.

때로는 이름 모를 손님이 지나가며 “건강하세요”라고 인사하고, 어떤 날은 예전에 단골이던 학생이 어른이 되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 순간마다 어르신의 하루는 조용히 채워집니다.


풀빵 한 입에 담긴 세월과 추억

풀빵을 조심스럽게 포장하며 어르신은 미소를 짓습니다.

“누가 ‘어릴 때 생각나요’ 그러면요… 마음이 그냥 뭉클해져요.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 그 순간 다 설명이 돼요.”

풀빵은 단순한 간식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고, 그리움이 스며 있습니다. 박종식 어르신의 하루와 손길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겨울바람이 불어오는 골목 끝, 종이봉투 속 풀빵에서 피어오르는 김은 사람들의 추억을 불러내는 따뜻한 신호입니다.


기자의 짧은 기록

  • 박 어르신의 풀빵 장사는 삶을 따뜻하게 데우는 작은 불씨였습니다.
  • 반죽에는 정성이, 팥소에는 마음이, 풀빵 하나하나에는 어르신의 사계절이 담겨 있었습니다.
  • 시니어 창업이란 어쩌면 ‘익숙한 자리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 시장 끝 그 자리, 그 풀빵 냄새가 오늘도 누군가의 추억을 데우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풀빵처럼 천천히, 그러나 깊게 퍼져 나갑니다. 어르신의 하루는 작은 틀 안에서 시작되지만, 그 온기는 시장 끝을 넘어 많은 이들의 마음속까지 스며듭니다. 오늘도 누군가 그 풀빵 한 봉지를 들고 집으로 가며, 잊고 있던 겨울의 추억을 조용히 꺼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추억은, 마치 갓 구운 풀빵처럼, 오래도록 마음속을 따뜻하게 데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