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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촌 이야기

(귀촌 이야기 16편) “시장 한켠, 어르신의 옛날 풀빵 장사” – 이만수 씨의 귀촌 일상

 

귀촌 이야기 16편
“시장 한켠, 어르신의 옛날 풀빵 장사” – 이만수 씨의 귀촌 일상

글: 강창모 기자

※ 본 콘텐츠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창작 기사이며, 등장 인물은 모두 가명입니다.
※ 본 콘텐츠에는 AI 기반 이미지 생성 도구를 활용한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으며, 실제 인물이나 장소와 무관합니다.


장날 아침, 냄새가 먼저 말을 거는 곳

“도시에선 일 없어 힘들고,
시골에선 바빠서 힘들다지만요,
전 여기서 제 손으로
제 하루를 만들어보려 했어요.”

경북 의성 5일장. 이른 아침 안개가 걷히기도 전에, 장터 구석에 손수레 하나가 조용히 자리를 잡습니다. 기름 냄새보다 먼저 퍼지는 건 노릇노릇 익어가는 풀빵 냄새. 장바구니를 든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고, 멈칫하던 발걸음이 하나둘 그 냄새 앞에 선을 그립니다. 굽는 소리, 뒤집는 리듬, 봉투 속에서 피어오르는 김까지—아침의 장터는 그 작은 원형 틀에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 손수레를 지키는 사람, 이만수 씨(72). 서울에서 오랫동안 인쇄소를 운영하다 몸을 다쳐 가게 문을 닫고, 시골에 내려온 지 3년째입니다. 도시의 소음과 마감 시간표에 맞추던 몸은 어느새 새벽 바람과 장날 달력을 기억하기 시작했습니다.


멈춤 이후, 다시 시작을 배우다

“처음엔 할 게 없더라고요.
몸이 한가하니 마음이 무거워졌어요.
아무도 안 찾고,
문자 한 통 안 오는 하루가
이렇게 긴 줄 몰랐어요.”

일이 멈추자, 시간의 무게가 손에 잡힐 만큼 두꺼워졌습니다. 시골의 낮은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닭 울음, 느릿한 마을버스 소리, 해가 지며 붉어지는 논두렁—모든 풍경이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게 어릴 적 기억 속 풀빵이었습니다. 겨울이면 시장 한복판에서 김 모락모락 피우며 굽히던, 그 둥근 빵의 냄새와 모양.

“그걸 해보자 싶었어요.
처음엔 웃기다 소리도 들었죠.
근데 장터에선 냄새가 먼저 말을 거니까요.”

중고 손수레에 철판을 얹고, 반죽은 유튜브로 배우고, 첫 풀빵은 모양도 엉망이었지만 그는 오히려 웃었다고 했습니다. “내가 뭘 만들고 있다는 게 그게 그렇게 좋더라고요.” 둥근 틀에 반죽을 붓는 순간,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앞으로 구르기 시작했습니다.


장터의 리듬, 손끝의 기술

지금은 장날마다 그 자리를 지킵니다. 반죽은 전날 밤 미지근한 물과 밀가루를 섞어 숙성시키고, 팥소는 달지 않게 한 번 더 눌러 졸입니다. 간판 대신 웃음으로, 광고 대신 냄새로 손님을 끌어 모읍니다. 어르신들이 “이거 어릴 때 먹던 맛인데?” 하며 풀빵을 하나 더 집어가는 순간, 하루치 수고가 한 번에 보상받는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돈보다 더 값진 건, 지나가던 이가 “또 오셨어요?” 하고 건네는 인사. 그 짧은 문장이 작은 가게의 재방문 쿠폰처럼 그의 하루를 더 단단하게 붙잡아 줍니다. 시장 상인들은 배달 온 밀가루 포대를 함께 들어주고, 이웃 좌판에서는 남은 계란을 나눠줍니다. 서로의 장사와 체온을 조금씩 보태며 장터는 공동의 부엌처럼 움직입니다.

“오늘도 반죽하고, 굽고,
손수레 닦고 나면
아, 나 잘 살았구나 싶어요.”


풀빵 한 장에 담는 귀촌의 의미

기자는 그의 손등을 봤습니다. 풀빵을 뒤집는 손, 철판 앞에서도 느긋한 표정, 그 손끝엔 무언가 잃었던 것을 다시 찾아 붙잡은 사람만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엔 철판을 낮추고, 비가 오는 날엔 천막을 조금 더 내립니다. 그리고 장날이 아닌 날에는 마을회관 난로 곁에서 새 레시피를 적어 내려갑니다.

귀촌이란 건, 세상에서 물러나는 일이 아니었어요.
작아도 내가 빚는 삶을 다시 시작하는 일이었죠.

“풀빵 장사라고 말들 하지만요,
전 여기서
제 하루를, 제 이름으로
다시 살고 있어요.”

시골의 시간은 느리지만, 그 느림 속에서 몸과 마음은 제자리를 되찾습니다. 도시에선 성과표가 하루를 재단했지만, 여기서는 잘 부풀어 오른 반죽과 고르게 익은 한 판이 오늘의 수고를 증명합니다. 장부에 찍히는 숫자만큼이나, 손님이 봉투를 품에 안고 돌아서며 남기는 한마디가 그의 삶을 전진시킵니다.


장터가 가르쳐 준 것들

  • 아침의 냄새는 곧 손님의 첫 인사다 — 반죽의 온도와 철판의 화력이 하루를 정한다.
  • 잘 구운 한 판의 기쁨은 오래 간다 — 품질이 곧 광고라는 단순한 진실.
  • 관계가 재고보다 먼저다 — 옆 좌판의 안부가 오늘의 장사를 지탱한다.
  • 적당히 번 돈보다 제 이름으로 번 하루가 더 든든하다.

이만수 씨의 귀촌 일상은 거창한 성공담이 아니라, 작지만 분명한 회복의 기록입니다.

도시에선 일 없어서 힘들고, 시골에선 바빠서 힘들다 했지만, 그는 오늘도 반죽을 젓습니다. 그릇 바닥을 긁는 소리, 국자에서 떨어지는 묵직한 선, 틀에 반죽이 퍼지며 만드는 동그란 경계—그 모든 순간이 ‘다시 산다’는 말의 촘촘한 증거가 됩니다.


따뜻한 내레이션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는, 삶을 다시 둥글게 만들어 줄 작은 철판 한 장이 필요합니다. 장터의 바람 속에서도 식지 않는 온기처럼, 당신의 오늘도 누군가의 기억 앞에서 노릇노릇 익어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한 판이 익는 동안 서로의 안부를 묻고, 봉투를 건네며 미소를 나눕니다. 그렇게 우리는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각자의 자리에서 제 이름으로 빚은 하루를 완성합니다. 내일 장날에도, 그 자리에 다시 불이 켜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