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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이슈 이야기

사회 이슈 이야기 16편 《돌봄도, 쉼도 없는 밤 – 요양보호사 김정자 씨의 12시간》

사회 이슈 이야기 16편
《돌봄도, 쉼도 없는 밤 – 요양보호사 김정자 씨의 12시간》

글: 강창모 기자

※ 본 콘텐츠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창작 기사이며, 등장 인물은 모두 가명입니다.


밤이 시작되는 순간

“내가 쓰러지면, 그분들은 누가 돌봐요.”

서울 성북구, 한 요양원의 밤. 저녁 8시, 김정자 씨(65)는 하루의 첫 발을 내딛습니다. 근무복을 여미고, 이름을 부르며 방문을 엽니다.

“정자 왔어요, 어르신.”

그 말 한마디에 침대에 누운 노인의 눈동자가 반짝입니다. 기저귀를 갈고, 체온을 재고, 불편한 몸을 살며시 일으켜 줍니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습관처럼 배인 정성과 조심스러움이 묻어납니다.

밤은 조용하지만, 조용하다고 쉬운 시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작은 신호 하나까지 귀를 곤두세워 듣게 되는 시간이죠.

오후 8시 30분, 약 복용 체크표를 다시 한 번 훑습니다. 9시가 가까워지면 각 병실의 조명을 낮추고, 침상 난간을 올립니다. 침대 옆 호출벨을 손 닿는 곳으로 옮겨 놓는 것도 빠뜨리지 않습니다. 작은 준비가 밤의 길이를 버티게 합니다.


밤 근무의 무게

“밤이 더 힘들어요. 아픈 데는 더 쑤시고, 잠 못 드는 어르신들도 많고… 계속 깨어 있어야 하죠.”

정자 씨는 요양보호사로 13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몸이 더는 버티기 어려워 낮 근무에서 밤 근무로 옮겼지만, 밤은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자정이 넘으면 허리가 쑤시고 무릎이 욱신거립니다. 기록지를 적다 말고 잠시 눈을 감으면, 쏟아지는 피로 사이로 텅 빈 창밖의 어둠이 스며듭니다.

밤의 고요 속에서, 그녀는 오히려 더 깊은 외로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외로움조차 잠시 내려두고 다음 호출에 응답합니다.

밤 10시 30분, 체위 변경을 시작합니다. 등과 엉덩이에 눌림이 생기지 않도록 베개를 대고, 팔과 다리의 각도를 조절합니다. 11시에는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드리고 입술에 보습을 바릅니다. 새벽으로 갈수록 체온 변화에 민감해져 담요를 한 겹 더 덮어 드립니다.

자정 무렵, 복도 끝 방에서 종종 들리는 작은 신음. 그녀는 발소리를 낮춘 채 들어가 이불 모서리를 펴고 손을 가만히 잡아 줍니다. “괜찮아요, 어르신. 숨 고르시고요.” 그 말에 긴장이 풀리면 표정이 천천히 이완됩니다.


잊힌 이들의 곁에서

요양보호사의 밤에는 정년도, 관심도, 기다림도 없습니다. 허리가 휘어도, 감정이 마모돼도 누군가의 밤을 지키기 위해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가족들이 오지 않는 분들이 많아요. 그럼 제가라도, 누군가 곁에 있다는 걸 느끼게 해드려야죠.”

돌봄은 단순히 ‘일’을 넘어,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리입니다. 말수가 줄어든 어르신의 손을 잡아 주는 일, 물컵을 반쯤 채워 베개 높이에 맞춰 드리는 일, 밤새 젖는 이불을 한 번 더 확인하는 일—작은 손길이 하루를 버티게 합니다.

새벽 1시 30분, 방황하듯 문턱을 넘는 어르신을 부축해 침대로 모십니다. 2시에는 경보 매트가 울립니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다시, 또 다시 기저귀를 갈아 드립니다. 3시에는 점성을 확인해 탈수 증상을 의심하고, 미온수로 입술을 적셔 드립니다. 4시가 넘어가면 손등의 검푸른 혈관이 더 도드라져 보입니다. 그 손을 덮어 주며 “조금만 더 주무세요” 하고 귓속말을 남깁니다.

  • 체위 변경: 2~3시간 간격으로 반복
  • 수분 체크: 컵 용량 기록, 응가·소변 횟수와 함께 표기
  • 야간 약 복용 확인: 복용 누락 여부 재점검
  • 낙상 예방: 침상 난간, 호출벨, 바닥 미끄럼 상태 수시 점검

이 모든 과정은 누군가의 새벽을 무사히 건너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다리 놓기입니다.


끝나지 않는 하루

새벽 5시, 첫 기저귀 교체를 다시 시작합니다. 근무는 곧 끝나지만 그녀의 하루는 또 이어집니다. 동이 트면 집으로 돌아가 잠깐 눈을 붙이고, 다시 하루를 준비합니다.

피곤함이 쌓여도, 몸이 무거워도, 그녀는 매번 같은 시간에 그 자리에 섭니다. 왜냐하면, 오늘 밤도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돌봄의 시간은 ‘교대’가 있지만, 돌봄의 마음엔 교대가 없습니다. 다음 교대자에게 인계서를 건네는 그 순간까지, 그녀는 끝을 끝처럼 대합니다.

아침 7시 30분, 짧은 인계가 끝나면 복도 끝 창으로 햇살이 흘러듭니다. 손등에 남은 소독약 냄새,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 공책에 눌린 글씨. 그 모든 흔적은 누군가의 밤이 무사히 지나갔다는 증거가 됩니다.


김정자 씨는 묵묵히 잊힌 이들의 밤을 안습니다. 말 없는 침묵도, 홀로 남은 몸도, 그녀의 손끝에서 조용히 다시 살아 있는 시간이 됩니다.

밤새 이어진 그 손길은 단순한 돌봄이 아니라, 누군가의 하루를 다시 시작하게 하는 첫 불빛입니다.


따뜻한 내레이션

세상은 새벽이면 어제와 같은 얼굴로 돌아오지만,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그 밤을 붙들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도 어둠 속을 걸어 나온 한 사람의 발걸음이 현관 앞에서 잠시 멈춥니다. 작은 숨을 고르고, 어제의 피로를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다시 마음을 여밉니다. “오늘 밤에도 괜찮을 거예요.” 그 다정한 예감이 또 한 번의 밤을 건너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