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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사람 이야기

일상 속 사람 이야기 16편 《나무 그늘 아래, 그 노인의 의자》

일상 속 사람 이야기 16편
《나무 그늘 아래, 그 노인의 의자》

글: 강창모 전직 기자 | 발행일: 2025. 7. 12.

※ 본 콘텐츠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창작 기사이며, 등장 인물은 모두 가명입니다.


햇살 좋은 날, 변함없이 그 자리

“오늘은… 올지도 모르지. 햇살이 이렇게 좋은 걸.”

서울 성산동 작은 동네 공원, 느지막한 오전. 나무 그늘 아래 강철수 어르신(79)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회색 스웨터 소매를 한 번 내려보고, 옆에 놓인 보리차 병을 손끝으로 살짝 만집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아무 말 없이 먼 데를 바라봅니다. 그의 하루는 이렇게, 소리 없는 기다림으로 시작됩니다.


동네 사람들이 기억하는 풍경

“항상 그 자리엔… 그 어르신이 계셔요.”

유모차를 끄는 엄마,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할아버지, 조깅하는 이웃까지 “오늘도 나오셨네요” 하며 인사를 건넵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작게 손을 흔듭니다.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은 그 손짓은,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말이 없어도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 동네의 시간은 조금 느리게 흐릅니다. 그의 존재는 마치 동네의 시계처럼, 늘 같은 자리를 지켰습니다.


기다림을 멈추지 않는 이유

어느 날 누군가 무심히 물었습니다. “왜 매일 나오세요?”

그는 고개를 들어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 말없이 웃고 나서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혹시라도… 오늘은 올까 싶어서요. 기다리는 마음은 멈추면 안 되잖아요.”

그 짧은 한마디에 모든 이유가 담겨 있었습니다. 더 묻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말이면 충분했으니까요.


스스로를 기다리는 날

한여름, 그늘 아래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던 날이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그늘도 더운 거예요. 혼자 앉아 있는 게… 괜히 서글프더라고.”

말끝을 흐리던 그는 잠시 웃었습니다. “근데요, 그 다음날엔 또 나왔더라고요. 아마… 내가 나를 기다렸나 봐요.”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과 동시에, 그 자리에 있는 ‘자신’을 다시 만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늘 비워둔 옆자리

그가 앉는 벤치에는 언제나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습니다. 누가 다가오면 그는 천천히 손을 흔들며 말했습니다.

“이 자리는… 그냥 조금 비워둘래요.”

그 말은 조심스럽고 오래된 약속 같았습니다. 누가 올지는 몰라도, 그 자리는 항상 깨끗하게 남겨 두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빈자리를 보며 언젠가 돌아올 누군가를 함께 떠올렸습니다.


가을 바람과 감긴 눈

가을 바람이 불던 날, 그는 무릎 위에 담요를 하나 얹고 앉아 있었습니다.

“요즘은 좀… 쉽게 피곤하네요. 그래도 앉아 있어야죠. 혹시라도 오늘은… 올지도 모르니까요.”

보리차를 한 모금 넘기고 잠시 눈을 감은 그의 모습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조용했습니다. 그 순간, 그 자리에는 계절과 시간이 함께 머물렀습니다.


그 벤치가 남긴 온기

언제부터였을까.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시작한 건.

하지만 벤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누구도 그 옆자리에 앉지 않았습니다. 보리차 병 하나가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놓여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아이가 물었습니다. “엄마, 저기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는요?”

엄마는 말없이 벤치 쪽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아이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그 자리는, 아직도 따뜻했습니다.


따뜻한 내레이션

기다림은 누군가를 위한 것일 수도, 스스로를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무 그늘 아래의 벤치는, 그가 떠난 후에도 기다림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흘렀던 시간과 계절, 그리고 늘 비워둔 옆자리의 의미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습니다. 언젠가 그 빈자리를 새로운 사람이 채우더라도, 그 온기와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또 다른 기다림을 시작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햇살 좋은 어느 날, 우리는 문득 그 자리에 다시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