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 속 사람 이야기

일상 속 사람 이야기 17편 《빨간 앞치마의 아침 인사》

일상 속 사람 이야기 17편

《빨간 앞치마의 아침 인사》

※ 본 콘텐츠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창작 기사이며, 등장 인물은 모두 가명입니다.
※ 본 콘텐츠에는 AI 기반 이미지 생성 도구를 활용한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으며, 실제 인물이나 장소와 무관합니다.

글: 강창모 전직 기자


국물이 끓는 소리로 시작되는 하루

“국물이 끓고 있으면요… 사는 게 조금 덜 막막하더라고요.” 서울 중랑구, 좁은 골목 끝 작은 반찬가게. 간판도 없지만 주방 불은 새벽부터 켜진다.

이정옥 씨(66)는 30년째 그 불 앞에서 아침을 맞는다. 그녀의 빨간 앞치마는 어느새 골목 사람들에게 아침 인사의 상징이 되었다.

국이 끓는 냄새가 퍼지면, 그곳은 단순한 가게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데우는 작은 쉼터가 된다.


국은 서두르지 않는다

냄비엔 무, 다시마, 멸치가 들어간다. 김이 천천히 피어오르고 라디오는 낮게 흐른다.

“국이요? 시간 줘야 해요. 그냥... 알아서 끓을 때까지 두는 거죠.”

이정옥 씨의 손놀림은 늘 조용하고 느리다. 그 느림 안에는 오래된 정성이 묻어 있고, 그 정성은 국물 맛에 고스란히 배어난다.

그녀의 국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삶을 버티게 하는 온기였다.


“아침에 누가 인사해준다는 거… 참 좋은 일이에요”

일곱 시 무렵, 가게 문이 열린다. “이모~ 오늘은 무슨 국이에요?” “미역국. 아들 생일이라 좀 더 끓였어요. 남은 거 싸줄게요.”

누구에게나 ‘이모’. 이름 대신 그 호칭이 더 익숙하다. 손님이 문 열고 들어와 “잘 먹겠습니다” 한마디 해주면, 그날 하루가 조금 덜 외롭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레 뚜껑을 연다.


비 오는 날엔 된장국을 먼저 올린다

장맛비가 내리던 날, 골목엔 물웅덩이가 번졌다. “비 오는 날엔요… 된장국이 속을 좀 눅여줘요.”

그날은 된장국 냄새가 문 밖까지 퍼졌다. 젖은 우산 옆으로 국 냄비에서 하얀 김이 오르고, 가게 안엔 따뜻한 숨결이 가득했다.

그 순간, 작은 반찬가게는 빗속의 피난처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품어주었다.


골목이 사라져도 남는 것

재개발 소문이 돌았다. 이 골목도, 이 가게도 사라질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담담하다.

“근데요… 나는 괜찮아요. 여기 다니던 사람들 얼굴, 누가 무슨 국 좋아했는지, 다 외워뒀거든요.”

불을 끈다고 기억까지 꺼지는 건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수많은 국물과 웃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국물이 끓는 아침이 있다는 것

“사는 게요… 그렇게 거창하진 않아요. 국물이 따뜻하면, 마음도 좀 풀리거든요.” 이정옥 씨는 오늘도 같은 시간, 빨간 앞치마를 두른다.

가스 불 위로 국물이 조용히 끓고, 그녀는 말없이 김을 닦고, 국을 나눈다. 그 아침, 그 소리, 그 온기는 누군가에겐

‘오늘도 괜찮게 살고 있다’는 조용한 증거

가 된다.


따뜻한 마무리

빨간 앞치마와 함께 시작된 국물 끓는 아침은, 사람들에게 단순한 끼니 이상의 의미를 남긴다. 이정옥 씨의 가게에서 나눈 국 한 그릇에는 외로운 마음을 달래는 정성과, 골목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다정함이 담겨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화려한 풍경이 아니라, 이렇게 평범하지만 온기를 전하는 하루의 순간들이다.

오늘도 누군가의 삶을 데우는 국물이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이, 참 고맙다.